글쓰기법

생명력잇는 시를 쓰려면---1

이관형 2010. 12. 24. 13:05

- 옮긴 글 -

제가 중3이나 고1 무렵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동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로서는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춘기였으니까 저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대해서 궁금한 점, 의심나는 점 들이 자꾸 생기면서,

이럴 때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져서 시를 읽기 시작했겠지요.

시를 읽다 보니까 '이 말도 참 근사하지만 나는 나대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 할 얘기가 있다.' 생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읽은 시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3 때 읽고서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뭔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제 가슴 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할 말이 한 마디 있다는 생각으로, 시를 처음 써 본 것이 첫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자기가 남한테 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아주 뒷날의 일이지만,

시는 얘기이되 남한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하는 사람
영국의 계관시인 워드워즈가 친구인 코울리지와 함께 서정시집을 냈습니다.

18세기 초에 나온 초판에서는 이런 말을 안했고, 재판을 내면서 그 서문(序文)에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란 결국 남에게 하는 얘기다. 다만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하고 보통 사람하고 다른 점이라면, 보통 사람은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없지만,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확하다'는 말에는 '간단하고 짧게'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 '힘있게'라는 말에는 감동을 준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죠.

분명하고 짧게, 그렇지만 남한테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 결집체가 곧 시라는 말이 되겠는데,

제가 처음에 시를 쓰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 봐도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싶어서 시를 읽기 시작했고, 또 힘있고 명확하게 하는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워드워즈를 읽기 전이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젊을 때 시를 쓰고 늙으면 시를 못 쓴다는 말은 워드워즈 때문에 생겼습니다. 워드워즈는 젊을 때에는 굉장히 좋은 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업혁명기에 시의 언어를 새롭게 발견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중 언어'를 발견한 사람이지요.

그 이전에는 모두 문어(文語) 즉,

상류층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로 시를 썼는데 워드워즈부터 비로소 평민들이 쓰는 구어(口語)로 시가 씌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세계시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력(詩歷)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젊은날에는 근사한 시를 쓰고 생각도 진보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집안의 유산을 챙기고 나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젊었을 때 쓴 시는 민중 언어로써 참 훌륭하게 씌어진 것들이 적지 않은데, 나이 들어서 쓴 시들은 이른바 쓰레기가 된 것이 많습니다.

이를 두고 가리켜서 로버트 브라우닝 같은 사람은 "워드워즈는 39세까지만 살다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년은 봄/봄은 아침/아침은 7시/하늘엔 종달새가 날고'(The year's at the spring,/And day's at the morn;/Morning's at seven;/The hill-side's dew-pearl'd;/The lark's on the wing;/the snail's on the thorn;/God's in His heaven--/All's right with the world!)

하는 「비파의 노래(Pippa's Song)」라는 시를 쓴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 시보다도 워드워즈를 욕해서 더 유명해질 정도였습니다. '

워드워즈는 30세까지만 살았어야 된다. 괜히 팔십 넘게 살아서 시인 모두를 망신시켰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사실 외국에는 나이 들어서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나라에도 워드워즈를 닮은 시인들이 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저는 이렇듯 처음에는 남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들려 주는 시들이었습니다.

그 때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용악입니다.

그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몇 달씩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읽어도 아무 일 없습니다.

민주화가 된 덕분에 다시 우리 문학사 속에서 복권된 아주 훌륭한 시인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그의「북쪽」이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 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제가 이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슴 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때는 이용악 시인이 월북을 했는지조차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그분의 시집을 구해, 시집 맨 앞에 실려 있던 이 시를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지요.

이걸 읽으면서 저는 우리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인이 팔려가고, 외국한테도 쩔쩔매고, 가난하게 살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 바로 이용악의 「북쪽」이었습니다.
얼마 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갈대」라는 시로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아서입니다.

제가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나 동료 시인들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10년이나 15년 전의 시조차 잘 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되어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해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에 제가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묻곤 할 때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금기시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시도 있으니까 그것들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은 시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유종호 씨의 아버지인데,

저는 그런 면에서 참 행운아였지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동료 문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나 이용악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벌써 옛날 시인이고 지금은 그 사람의 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도 좋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홍명희의 「임꺽정」 얘기를 하면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하고 술자리에서 얘기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작고한 천상병과 유종호였습니다.

저하고 천상병과는 여섯 살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상병이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고 상대를 잘 안해 주려고 하다가,

내가 현덕의 소설을 읽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제서야 이 사람이 술을 먹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야! 임마 니가 어떻게 현덕을 읽었어?" 하는 천상병의 말에, 저는 "내가 왜 못 읽어!" 하면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암송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진짜로구나!" 하면서 백석 시 이야기로 번지고 하면서 친해졌지요.

인사동에 나오면 르네상스 다방을 찾아 천상병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천상병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니까 술 얻어먹을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옛날 소설을 읽은 동지로서 유일하게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 때 실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거지요.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면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길거리에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이 허다하고, 버스를 타면 옆에 와서 껌 사달라고 생떼쓰는 상이군인들 때문에 불편할 정도였지요.

그냥은 못 갔습니다.

수없이 사줘야 되고, 돈 없으면 욕도 먹어야 했고, 거리마다 무너진 집, 폭탄 맞아서 쓰러진 집 들이 복구되지 못한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당시에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것은 신이 어떠니, 까뮈가 어떠니 사르트르가 어떠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옛날식으로 꽃이 어떻고 님이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하는 타령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자연히 시를 쓰는 데 흥미를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 우연히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수요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술도 먹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제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날 만나면 일주일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무엇에 대해서 읽었는지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책방 찾아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구해 읽었습니다.

남들이 거의 안 읽었을 책을 구해 읽은 다음 모임에 나가 감동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날의 대장이 됩니다.

돈을 추렴해서 술값을 내는데, 그 사람은 술값을 안 내도 됩니다. 3차 4차를 가도 그냥 먹는 거지요.

각설하고-  이기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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