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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있어서 관찰과 상상력 - 구상

이관형 2010. 10. 22. 12:46

시에 있어서  관찰과 상상력 - 구상
시창작에 있어서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이 그 비결임은 이미 언급한 바로서
이 두가지 능력이 시인이나 작품의 우열을 결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두가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는 풍부한 경험과 왕성한 기억력을 필요로 하지만
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주제로는 내세우지 않고 글 속에서 그 상관 관계만을 살펴보기로 하며
그리고 이번 항목에서는 나의 이론의 전개보다 세계 굴지의 탁월한 시인들의
그 신작 경험을 통한 소견들을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의 이해에 깊이와 넓이를 갖추게 하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시에 있어서 관찰인데,
어떤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면밀한 관찰은 시뿐 아니라 과학에 있어서도 필요로 하지만
시에 있어서의 관찰은 과학의 자와 같은 정확성이나 현미경과 같은 정밀성이라기보다 어린이와 같은,
또는 최초의 인간과 같은 시력, 즉 눈과 마음의 순수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을 영국 낭만주의의 봉화를 올린 시인의 한 사람이며 비평가인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cge, 1772∼1834)는
시인이란 어린이의단순성을 어른의 모든 능력 속에 지니는 사람이다.

그는 관습에 짓눌리지않고 버릇에 사로잡히지 않는 심혼으로 어린이와 같은 신선함과 경탄을 가지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고 말하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독일의 시인릴케는 〈자연을 가까이하라,
그리고 마치 최초의 인간의 한 사람처럼 자기가 보고 경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리는 것을 표현하려들라>고 말한다.
위의 말들은 시인의 사물에 대한 생소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으로 가까이하는 평범한 사물이라도 건성으로 통념 속에서
습관적으로 보지 않고 예리하고 면밀하게 관찰했을 때
이전에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새로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물에 대한 관찰의 소홀에서만 아니라 그 사물이 지니는 현상[事象]이 때마다 변하기 때문이요,
더구나 그 사물이 지니는 이치의 세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존재(사물)는
오묘한 신비로 감싸여져 있고 진·선·미를 구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시인이 어떤 사물에서 저런 실재의 새로움을 발견했을 때 그 놀라움이 마치 티없는 마음의 어린이나
세상 사물을 처음 대하는 최초의 인간의 것과 같다는 말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일상적인 생활의 흐려진 눈,
즉 축적된 상식과 그 경험으로는 모든 사물에 실용적인 판별의 휘장이 가려져서 사물의 살상이나 실존을 볼 수가 없고
그런 지각에서는 시심이 발동되지도 않고 시를 쓸 수도 없다.

특히 일반 사물보다 인생에 대해서 그런 판별은 더구나 금물로서 현대
영국의 시극(詩劇)작가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토퍼 프라이(Christopher Fry, 1907∼ )는〈인생은 모든 기적 중에서도 기적적인 기적이다. 가령 사람이 이전에 사람의 손을 본 적이 없이 불시에 이 기묘하고 놀라운 것을 내보였다치면 그것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게 생각될 것인가! 나는 인생을, 평범한 사람을 이처럼 보려고 한다. 마치 한길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그것을 처음 만난 듯이 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눈의 새로움과 놀라움이 실제에 있어 결코 철부지 어린애의 것과 같아서는 안 되고, 또 그리 될 수도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을 역시 현대 영국의 저항적인 행동의 시인 스펜더(Stephen Spender,1909∼ )는 그의 『인생과 시인』이라는 저서에서〈그것(저러한 새로움과 놀람은 어린애 같은 단순이나 유치함과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지각의 세계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경험의 기억과 이어진 연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ㅡ가령 한 사내가 로케트를 타고 달세계에 도착했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끊임없이 지구와 통신을 교환하며 날마다 자신의 소식[새로운 체험]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가 달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지구에서 그가 설명받은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달의 자연상태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가상의 관념과도 판이하다. 그래서 그가 달에 대해서 새로 경험한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사람들에게 그 달을 상상시키는 수밖에 없는데 이때 그는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달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의 달의 경험을 자신들의 생활과 결부시킬 수가 없다〉고 아주 함축성있게 설명한다. 더구나 이 글이 실린 책이 1942년 출판이라 아직 인간이 달에 도착 이전이기 때문에 그 뒤 월면상륙(月面上陸)보고가 이 비유를 여실히 증명한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시인은 자기의 삶 속에서의 모든 사물을 접하는 데 있어 마치 로케트로 달에 처음 발을 내딛은 인간처럼 신선한 관찰을 하지만 그것을 표현·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과거 경험에 연결된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시의 창작에 있어서는 사물에 대한 선입관이 없는 순수한 관찰
과 더불어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왕성한 상상력의 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시인의 경험에 대해서
릴케는 저 유명한 『말테의 수기』에서,〈시는 사람들이 보통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 아니다(감정이라면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지닌다). 시는 체험이다.

그래서 한 줄의 시를 위하여는 여러 도시와 각양각색의 사람이나 사물들을 접해야 한다. 그리고 짐승들의 습성을 알아야 하고, 새들의 나는 모습도 살펴야 하고, 동이 틀 때 꽃의 벙그는 모양도 눈여겨두어야 하고, 가보지 못한 고장의 한길 따위도 익혀두어야 하고, 뜻밖의 만남이나 애틋한 이별의 장면도 머리에 넣어두었다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의문, 극진한 사랑, 그것을 몰라서 그만 부모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일, 밤마다 달랐던 규방(奎房)의 어둠, 산고를 치르는 여인네의 비명, 해산 후 흰 이불을 덮고 잠든 여인의 안식 등 시인은 그런 추억들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의 베개 옆에 서 있은 경험이 있어야 하고 한편에서는 경련을 일으켜서 소동이 일고 있는 방에서 시체를 지키고 있어본 경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추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추억이 많이 쌓이면 그것을 잊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추억이 다시 한번 되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추억의 순화이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그 사물의 명색을 없애고 우리 자신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쩌다가 한 줄의 싯귀의 한마디가 그 추억의 핵심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아니 그런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나 할까〉라고 했는데,

그는 첫째 시를 쓰기 위해서는 경험의 다향성이 필요함을 역설한 다음 그 경험의 추억에 부착된 여러 가지 불필요한 폐물이 떨어져나가야, 즉 경험이 정련되고 순화 되어 몸 안의 피처럼 되었을 때 비로소 시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릴케의 저러한 경험의 중요성을 기억이란 측면에서 스펜더는 시인은 다른 사람보다도 자신이 경험한 감각적 인상을 결코 잊지 않는 인간이다.
그 경험의 인상을 시인은 본래의 신선함대로 몇번이고 재생할 수 가 있다〉고 말하며, 그 예로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신곡』의 소재는 그가 불과 아홉 살때 베아트리체와 만난 그 경험에서 이루어졌음을 쳐들고 덧붙이기를, 〈기억만이 시의 기능이라고 해도 아마 잘못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상상이란 것 그 자체가 기억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상상해내는 것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상상력이란 이미 우리가 일단 경험한 것을 떠올려 그것을 어떤 다른 상황에다 맞추는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란 그 기억이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뛰어넘어서 자기중심을 벗어나 멀리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아주 정밀한 관찰을 할 만큼 탁월한 기억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 기억의 약점은 그 자기중심적인 데 있다. 대부분의 시가 나르시시즘(자기도취)적 성질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실상 우리의 현실적 경험이란 거의가 수동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주체가 되는 사람은 변화무쌍한 일상적 경험도 그렇지만 어떤일시적 경험일 경우 그 생소하기 짝이 없고 뜻밖에 접하는 경험을 의식적으로 파악하여 객관화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시야에 일시적으로 들어온 사물에는 불문명하고 깜깜한, 즉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물의 어두운 부분을 조명해내는 작업이 없이 현실적 경험 (감동이나 감흥)이 아무리 강렬했다 해도 그대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이 어떤 자연이나 인간이나 세상살이 속에서 큰 감동을 받거나 감흥을 일으키고도〈쓸 수가 없다〉는 말은 그 때문인 것이다. 즉, 현실적 경험이 시가 되기 위하여는 그 주관적 경험인 감동이나 감흥의 실체가 하나하나 분해되고 분석되어서 객관적인 관찰의 조명을 받고 다시 파악되고 확인됨으로써 새로운 재구성에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듯 현실적 경험이 시적 경험으로 창조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상상력, 즉 연상력이 수반 발동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콤퓨터가 아무리 정확한 기억력을 갖추더라도 연상작용은 못한다.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어떤 한 기억을 불러일으켰을 때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공통한 요소를 지닌 무한량한 기억을 연결하는 그 능력에 있으며 그 상상력은 미경험의 세계까지도 창조한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시인 C.데이 루이스(Cecil Day Lewis, 1904∼72)는 「상상력의 육성」이란 그 의 글에서 〈상상력의 공간에 대한 관계는 기억의 시간에 대한 관계와 같다. 오관(五官ㅡ視·廳·嗅·味·觸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접하지 않는 데이터(자료)들을 정신에다 보내는 능력, 그것이 이매지네이션(상상력)이다.ㅡ 한편 시인의 이매지네이션은 우리들이 의지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모든 것과는 정반대로서,

의지가 행동을 양식(糧食)으로 삼지만 이매지네이션은 명상(暝想ㅡ상념의 집중, 필자가 제2장에서 낚시꾼이 찌를 바라보는 상태에다 비김)을 식량으로 삼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는 수동적 성질을 지니며 많거나 적거나 훈련된 감수성이며 자연이 예술을 기르는 자궁이다. 그것에서 태어난 시의 말이 새로움을 지닐 때 세계에서 가장 힘이 있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 위에 여러모로 살펴본바 시인의 경험과 관찰, 기억과 상상력으로 씌어진 소박한 구성의 실작을 하나 음미하면,

쓰러진 황산(黃山)의 소나무

그렇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자
너는 천둥소리를 내며 깊은 골짜기로 거꾸러졌다.
너는 이제 산마루에 다시 설 수가 없다
너는 이제 바람과 겨루거나 비와 다투지 않아도 된다.

너는 완전히 패배해서 자빠져 있다.
너의 수많은 바늘잎들은 시들어 누렇게 빛이 변했다.
검은 구름은 자랑스레 세상에 선포한다
너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ㅡ

세월은 오고 가고 바람과 비는 여전하고 태양은 그대로 빛나지만
너의 용 같던 몸에선 비늘이 온통 떨어져나가고
너는 썩고 부스러져서
마침내 새까만 흙더미로 변했다.

너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너는 말없이 씨를 남겼다.
씨들은 날아가서 산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린다.
너의 목숨이 억만으로 나뉘어 모두 구름 높이 솟으리라는 것은
오직 시간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시는 1986년 서울서 열린 아시아시인회의에 작품은 보내오고 참가는
못한 중공의 시인 왕닝유[王닝宇 Wang Ning Yu, 1935∼ ]의 시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단순한 구성이지만 중국시의 전초잉이 지닌 시언지(詩言志ㅡ시는 메시지다)의 강렬성과 그 표현의 웅장과 호방성이 잘 드러나고 있어 흥미롭다. 한마디로 말해 이 시의 주제는 만물의 생존번식의 자연법칙에 대한 작자의 새로운 발견과 그 놀라움으로서, 먼저 산마루의 장송(長松)이 벼락을 맞아 골짜기로 거꾸로 나가자빠지는 광경을 보고 그 경험에다 잎이 시들고, 껍질이 말라 떨어지고, 나뭇가지와 기둥이 썩는 다른 지식이나 경험의 연상작용을 하고 있으며, 한걸음 나아가서는 그 장송이 흩뿌리고 간 씨앗들이 나무가 되어 구름을 뚫고 솟을 미경험의 광경마저 상상으로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저렇듯 시인의 관찰력과 상상력이란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사물의 사실성이 아니라 그것(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물의 실재성인 것이다. 그래서 시가 사람에게 실제의 사물보다 오히려 더 핍진성(逼眞性ㅡ진실에 가까움)을 주고 감동을 준다는 것은 모두 다 저런 까닭인 것이다. 저 시가 우리가 흔히 소나무를 보고 느끼는 감동보다 훨씬 더 짙고 깊은 감동을 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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