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법

사랑의 시 써보기

이관형 2010. 10. 18. 16:28

사랑의 시 써보기
김현승은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푸타링 냄새가 풍긴다”고 썼지요. 구월인가 했는데, 어느덧 시월이 오고,

시월 첫머리 이어진 공휴일 사이에 끼어 있던 추석도 이미 지나가버렸지요.

가을이 깊어지고 밤이 더 길어지면 꽃의 피와 살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단단한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은 조실부모한 아이처럼 가슴에 시린

바람이 일겁니다.

그래서 오래 잠 못 들고 마음은 갈가마귀처럼 검푸른 하늘이나 떠돌겠지요. 올해 한가위 달은 보셨나요 ?

추석 푸른 어둠 내린 초저녁 동편 산위 하늘에 둥두렷이 떠오른 둥근 달은 생리혈이 비친 듯 붉은 빛을 띄고 있더군요.

하지만 조금 지나자 달은 해맑고 늠름해졌습니다.

여윈 달이 다시 차올라 만삭이 되는 건 자연의 이치지만,

그래도 고요한 저 하늘에 저렇게 둥근 달이 더 있는 걸 보는 건 늘 감회가 새삼스럽지요.

사위의 고요를 딛고 우뚝 떠오른 둥근 달은 볼만했습니다.

저 달을 보며 사람들은 소원을 빈다는데, 무슨 소원을 비셨나요 ? 저는 그저 평상심을 갖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지요.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로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이성선, 「고요하다」

천지사방이 고요하더군요. 나뭇잎을 갉는 벌레가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나뭇잎으로 착각해 갉아버릴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오(道悟, 748 ~ 807)라는 선사에게 숭신이란 제자가 있었습니다. 숭신은 스님을 극진한 정성으로 섬겼는데,

몇 해가 흘러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 스님은 도무지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는 것이었지요. 섭섭한 마음에 숭신은 스님께 따지듯 물었지요.
“왜 제게 몇 해가 지나도록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는 것이지요 ?”
“이 놈 봐라, 내가 몇 해가 가르쳤는데도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니, 고약한 놈일세 !”
“아니, 스님이 언제 저를 가르쳤단 말인가요 ?”
“이 놈아, 네가 차를 가져오면 마시고, 밥을 가져오면 먹고, 인사를 하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받지 않았느냐 ?”

도오 스님의 말뜻을 이해하셨나요 ? 깨달음에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평상심이란 걸 말하는 거겠지요.

밥때가 되어 밥을 먹고 차를 마실 때가 되면 차를 마시는 건

아무 뜻도 없어 보이지만 이게 바로 역행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평상심이라는 것이지요. 도는 평상심 속에 머물지요.

바둑에서 신수와 묘수가 필요한 것은 그 판세가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 몰렸을 때입니다.

묘책이나 비상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헤쳐나기 힘든 엄청난 난관에 부딪쳤을 때지요.

평상심이란 애초에 이런 묘책이나 용기가 필요한 상황으로 저를 이끌어가지 않는 무위(無爲)에 노니는 마음가짐입니다.

평상심의 기저는 단순과 고요입니다. 시적 바탕도 이 단순과 고요입니다.

단순과 고요는 세상의 떠들썩함, 분방함, 들뜬 욕망들, 허섭한 노여움 따위와는 먼 것이지요.

그러나 단순과 단조로움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지요. 단조로움이란 안목과 통찰의 협소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노자의 『도덕경』제27장에 선행무철적 善行無轍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뜻은 길을 잘 가는 사람은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입니다. 이런 경지가 아닐까요 ?

제가 노자의 『도덕경』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제45장에 나오는 대성약결 기용불폐 大成若缺 其用不弊,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듯 하나

그 쓰임에 끝이 없다, 혹은 대직약굴 대교약졸 大直若屈 大巧若拙 ! 정말 크게 곧은 것은 약간 굽은 듯 하고, 큰 기교는 약간 졸렬한 듯 보이는 경지가 아닐까요 !

서양시인 존 키츠는 이것을 “소극적 능력”이라고 했지요.

어떤 이는 이것을 “사실과 이유를 포착하려 바둥대지 않고 불확실함, 불가해함, 의문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능력”(유종호)이라고 설명합니다. 대개의 옳고 그름은 뚜렷하게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한몸으로 섞여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분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선택의 번뇌가 따르는 것이지요.

한몸 안에 있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그 속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은 깊은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일체의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에서 벗어난 복잡해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

오늘 우리는 사랑에 관한 시를 함께 써볼 텐데요.

우선 우리 시인들이 쓴 사랑에 관한 몇 편의 시를 함께 감상해보고, 시가 무엇인가 ?, 하는 시의 정체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 보겠습니다.

시가 무엇인가 ?, 라는 글은 너무 전문적일 수가 있으니까, 한 번 훑어보고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딱 두 가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첫째,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시에 대해 배운 것,

시는 이런 것이다, 하는 고정된 생각들을 버려야만 시에 대해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시는 우뇌를 쓰는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좌뇌가 많이 발달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대개 머리가 좋은 분들은 좌뇌 발달이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좌뇌를 잠깐 닫아놓고 잠든 우뇌를 깨워서 써보자는 것입니다.

좌뇌가 논리, 추론, 분석, 종합을 만든다면, 우뇌는 영성, 직관, 영감, 창의력을 관장합니다.

우뇌를 자극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지 말고, 몸을 쓰라”고 말합니다. 몸, 즉 우리의 오감을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유를 회화적으로 하라, 다시 말해 그림으로 사유를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해보기 좌뇌 깨우기 1
좌뇌 깨우기 2



시란 무엇인가 ?



1.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이다.

2.

나는 쓴다. 쓴다는 것은 자기가 지핀 불에 스스로 제 몸을 지지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존재함에 숙명으로 내장된 타성(惰性)과 피동성(被動性)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쓴다는 것에의 자발적 구속, 혹은 하염없는 투신 ! 쓴다는 행위는 결국 문체에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쓴다는 것, 그것은 불가피한 피의 요청이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필연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3.

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욕망이며, 꿈이 아니라 꿈에 대한 꿈이다. 시는 겹의 욕망, 겹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것을 결핍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현실에 대한 환멸이 징하게 깊어져 마침내는 내부에 궤양이 생기고 천공(穿孔)이 생기는 사태까지 악화된 뒤 그 치유의 방책으로 그 유토피아 ― 그것의 한국어 버전은 이어도이다 ― 를 찾아 헤매 다녔다.

우연이란 바다에 떠 있는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이다. 기껏 없는 것에 홀려 그토록 헤매 다녔다니 ! 살 떨린다 !

4.

시는 무엇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수면에 무심히 비친 풍경이며,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밑으로 흘러가 스미며 섞이는 마음 한 자락,

풍경에 묻어 풍경과 함께 오는 그 무엇이다.

시는 현실/세계의 구조화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횡단하는 예감이거나 선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도구적 이성의 전략이 아니라 감각의 깊이를 현현하는 그것의 몸-됨이다.

시는 세계가 걸치고 있는 낡은 겉옷의 구멍으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존재의 속살이다.

5.

시에의 숭고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의 치명적 중독으로 나는 반생을 소모했다.

6.

과연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내면에 움푹 팬 욕망 때문일까 ?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의미를 향한 어리석은 투신일까 ? 아니다,

나를 시라는 벼랑으로 떠민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땅에 박힌 사금파리처럼 어디서나 번쩍인다.

7.

한 번 변심해서 떠난 애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삶, 변심한 애인 !

8.

시, 변심한 애인을 향한 복수의 일념에서 비롯된 처절한 자해극 ! 결국 제 몸만 다친다.

9.

다음 단계는 놀이의 윤리학 !

10

그 다음 단계는 쾌락의 향연 !

11.

공리주의자들은 시를 의미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모든 문학 언어들이 전언과 의미로 환원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언표된 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거기서 삶의 부조리라든가, 선악의 분별이라든가 하는 것을 어쨌든 찾아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의미에 대한 과소비가 일어난다.

의미로 더럽혀진 손으로 시를 만지면 시가 배양해온 배아세포들, 혹은 시의 DNA는 의미로 오염되어버린다.

시는 역사의 화석이 진액으로 뿜어내는 의미가 아니다. 시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표면, 심연을 머금은 표면이다.

12.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 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인간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온다.”고 쓴다.

13.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감각적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주용일, 「봄비」)

14.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이다.”(프랑시스 퐁쥬)

15.

시를 쓰기 전에 명상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명상이 인습적 관념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16.

명상은 시의 반숙(半熟)이다. 그럼 완숙은 어떤 경지일까 ? 열반(涅槃). 하나의 생생한 현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순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시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짓이다. 시는 우주의 데이터 베이스를 훔치는 짓이니까. 플라톤이 역정을 내며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모조리 추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화국에서 시인들은 파렴치한 자들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1964년에 소비에뜨 공화국의 법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 브로드스키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법정에서 있었던 심문 내용의 일부를 보자. 판사 : 당신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사 : ‘~ 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쓴다. 출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판사 : 당신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썼다. 그것이 내 일이다. 판사 : 당신을 시인으로 공인한 것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없다. 그것은 나를 인간으로 공인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판사 : 소비에뜨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브로드스키 : 나는 일을 했다. 시가 나의 일이다. 나는 시인이다. 결국 브로드스키는 공화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로드스키의 재판은 시의 DNA가 생물학적 합목적성과 무관하며 공익적 세계의 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B.C. 322)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시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의 다섯 종류, 즉 불가능, 불합리, 도덕적으로 해로운 요소, 모순, 시 창작 기술의 올바른 기준에 반하는 것 등으로 구분된다.”고 쓰고 있다. 시, 무용한 짓. 상상임신. 옐로카드를 받는 헐리우드 액션.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의지와 표상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베르그송은 그것이 생의 비약이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시의 미학적 선택에 내재한 반도덕성, 무용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17.

명상은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한다. 초언어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상태다. 가령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 너, 가련한 육체여 / 살 것 같으니 술 생각나냐 ?”(김형영, 「일기」).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뒤 비어서 가뿐한 몸에서 태허를 감지한다.

18.

명상은 그 태허의 상태에서 사물들의 저편에 숨은 신을 만나는 일이다. 숨은 신은 죽은 고양이다.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 선사(禪師)가 대답했다. ― 죽은 고양이다. “국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 죽은 고양이의 / 저 망가진 외출복 !”(이창기 「봄과 고양이」)

19.

명상과 시는 그 계통분류상 다른 가지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명상과 시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명상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의 영감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뇌속에서 부화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 아니었음,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 밤의 가지에서, /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 격렬한 불 속에서 불러내어, / 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 / 얼굴 없이 있는 나를 / 그건 건드리더군.”(파블로 네루다, 「시」)

20.

깨달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한다. 다 틀렸다. 가짜들이다. 거기에 현혹되면 안 된다. 깨달음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지도 않다. 일본 불교의 한 맥인 본각사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이미 깨달았으니 다른 좌선(坐禪)도 필요 없다.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다. 조악무애(造惡無礙)의 뿌리가 본각사상이다. 도겐(道元, 1200 ~ 1253)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승려다. 도겐은 수행의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게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을 향한 지향이 있을 뿐이다.

21.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프랑스어로 명상의 깊이를 보여주는 프랑시스 퐁쥬는 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도 그 중의 일부다. 그러나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퐁쥬가 원할 때 그의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22.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그것의 흔적으로서의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적 흔적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물증이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의 물증 !

23.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를 지향한다.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物)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발화주체와 물(物) 사이에 있다. 언어는 발화주체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24.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25.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26.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와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

27.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28.

거울과 부성(父性)은 시와 상극이다. 다시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의 뒷면, 그 텅 빈 공허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조용미, 「청동거울의 뒷면」)

29.

의미로서의 시는 사물로서의 시보다 하급이다. B급이다. 하이쿠는 17자로 끝난다.

의미가 언어의 양에 비례한다면 하이쿠는 가장 무의미한 언어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대개는 언어와 반비례한다.

하이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 형식 중에서 가장 슬림하다. 하이쿠는 해석의 언어가 아니다.

사물과 만나는 순간의 아주 희미한 떨림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직 시로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적 흔적이다.

하이쿠에서 언어에 대한 근검절약은 의미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진다. 가장 성공한 하이쿠는 무의미의 의미를 체현해낸다.

하이쿠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을 겨냥한다.

하이쿠는 오류와 우연들에 필연의 에너지를 수혈하는 선(禪)과 명상에 가깝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30.

명상은 사물의 계통분류상 속(屬)이고 시는 그 하위에 속하는 종(種)이다. 명상은 유실수고, 시는 앵두나무다.

31.

시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지도다. 그 지도 속에 생의 지도가 숨어 있다.

32.

이때 지도는 현실과 현존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이다. 시는 현실의 현실,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시는 현실을 품고 부화시키는 하나의 가능 세계의 표현이다.

무의식의 보상(報償) 속에서 농익은 경험의 다양체들이 상징과 이미지라는 의사소통의 기호들로 함축되고,

사유와 상상들은 감각의 등고선으로 태어난다. 가장 좋은 시는 현존이 욕망하는 직관의 지도, 이미지의 지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의 지도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극락의 지도,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다.

33.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모지락스런 배반이며 해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정서는 어슴프레한 것, 언어 이전의 것이다. 시가 언어의 명료성을 저의 실존태를 삼는 게 사실이라면 정서 그 자체는 시가 아니다.

정서에 언어가 입혀지는 순간 그것은 불가피하게 시인의 개성과 기질을 드러낸다. 시는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다. 강을 건넌 자는 그것을 버린다. 시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 리듬, 비전을 추구한다.

34.

시가 항상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압축파일을 지향하는 게 그 증거다.

시는 언어의 금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수다를 추문으로 만든다.

시는 언어를 진술의 방법적 도구로 쓰되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영원한 모순명제를 산다.

시의 본래면목이 진술이 아니라 울음이며 노래이고,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계시로 어두운 하늘에서 우는 천둥이며 번개인 까닭이다.

35.

시는 언어도 아니요, 그것을 다루는 기교가 아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나아가는 데 시가 있다. 한 도공(陶工)은 이렇게 말했다.

“기술을 습득하는 데 3년이 걸렸지만, 그것을 깨끗이 없애는 데는 약 10년이 소요되었다.

”라고. 명색이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관사를 달고 30년이나 살았지만, 나는 3년 안에 능히 시 쓰는 기술을 익혔으나,

그것을 없애는 데는 30년이 소요되었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붉디붉은 호랑이』(2005)는 등단 30년 만에 내놓은 시집이다.

서문에도 밝혀 놓았지만 그만 시를 놓아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사실이다.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를 준비할 무렵부터 이런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시쓰기의 보람이 있고 없음 때문이 아니라 내 시가 더는 가망이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붉디붉은 호랑이』를 내면서 이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서른 해라면 아둔한 사람도 깨치고 나아가는 바가 있을 터인데,

가망 없는 걸 너무 오래 붙들고 있다는 회한이 작지 않았다.

본디 미련퉁이이긴 하나 세월의 궁리로 버려야 할 것과 쥐고 있어야 할 것에 대한 분별이 없지는 않다.

36.

뛰어난 솜씨꾼의 솜씨 속에는 뛰어난 솜씨가 없다고 한다. 감히 그 경지를 흠모하며 애써 익힌 것을 버리고 지우려 했는데,

시집 나온 뒤 꼼꼼하게 읽어보니 언감생심이다. 도끼날을 휘두르되 도끼날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내놓는 것마다 거친 도끼자국이 선연해 민망하다. 성속일여(聖俗一如)라는 깨우침은 말뿐일까,

시들은 미추와 선악의 경계와 분별이 선명한 의식으로 언어를 부리고 범상함에서 편안하지 못했다.

37.

시는 경험의 진술도 아니요,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38.

시는 경험을 청취하되 경험을 넘어서간다. 시는 오래된 기억이기 보다는 반기억(反記憶), 혹은 기억의 대속(代贖)이다.

시는 역사에 기생하지만 제 존재가 나온 근원이며 숙주인 역사를 부정한다.

역사의 언어는 화석의 언어이고 시의 언어는 생물의 언어인 까닭이다. 시는 의미의 정언적 요청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노는 놀이이다.

39.

시의 언어들은 역사에 투항할 때가 아니라 역사와 맞서며 긴장관계를 이룰 때 빛난다.

시를 빚는 욕망과 기억들은 역사가 내장한 도덕과 계시의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쾌락과 즐거움에 따라 움직인다.

시는 환원불가능한 것을 화석화시키는 대신에 생물로 끌어안고 그것과 연애한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과 연애를 하지만,

사물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뒤집어 이면을 본다.

40.

시는 사물에의 최면(催眠)이고 빙의(憑依)다. 시는 세상을 넓고 깊게,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기다. 그리하여 본질에 다가가기다.

허식과 기만을 뚫고 나아가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놀이다. 삶에 작동하는 규범적 윤리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며,

가망 없는 꿈들에 희망을 불어넣는 풀무질이다.

41.

시는 영토화된 것에서 탈주하기, 탈영토화 하기다. 영토화된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노자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고 했다. 시는 굳고 강해진 것, 그 주검을 가로질러 간다.

42.

시는 당대의 주류적 가치를 옹호하지 않고, 아직 현실에 당도하지 않은, 그래서 모호한 윤곽만을 드러내는 미래의 가치에 헌신한다.

모든 독재자들은 음풍농월은 즐기지만 진짜 시인들은 혐오하고 증오한다.

미래의 가치들은 독재자들이 옹호하는 오늘에 통용되는 가치의 진위(眞僞)와 미추(美醜)를, 기만과 사술(邪術)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시가 주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딴지 걸고 부정하기 때문에 시가 의미의 건축자가 아니라 파괴자라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시인은 낡은 의미의 파괴자이다. 독재자들은 시의 파괴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한 첫걸음이며 그 전제라는 걸 납득하지 못한다.

43.

시는 영웅, 비범한 성공, 웅장한 것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하찮은 것의 숭고함과 실패한 것들의 창백한 진실, 그리고 비루한 것의 장엄함에

바치는 한숨 섞인 헌사이다.

시인은 하찮은 것에서 위대함을 비루한 것에서 장엄함을 본다. 모래에서 은하계를, 피어나는 꽃에서 우주를, 오늘에서 내일을,

피어오르는 구름에서 번개와 우레와 비를 보는 게 시인이다.

44.

공리주의자들이 시인을 지상의 잉여적 존재로 폄하하는 것은 시가 실익과 상관없는 미학적 현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변호,

무(無)와의 덧없는 성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시인은 방외인으로 내침을 당한다.

예로부터 진짜 시인들은 후레자식, 광인, 떠돌이, 방랑자였다. 매우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현실의 적자가 아니라 서얼이다. 시인들이 현실의 총애를 구하지 않고 만물에 편재해 있는 道, 궁극적으로 영원, 초월,

절대의 도덕만을 섬기기 때문이다.

45.

시인은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산다.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득세하는 문명 세계에서 쓰는 것만으로 존재를 지탱하려는 자들은 무용한 열정에 들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들은 빗방울에서 움직이는 우주를 보며, 모래알에서 궤도에서 이탈한 별의 현존을 보며, 꽃봉오리를 흔들고 지나는 한 줄기 바람에서 탐미에의 몸짓을 본다. 시집이 안 팔리고 시가 헐값 취급을 당하는 이 세태의 천박함에 맞서 시인은 시로써 내면의 소리를 붙잡고, 세속이 품은 신성(神聖)을 직시하며, 언어로 우주를 건설하려고 한다. 시인은 무통문명(無痛文明)의 시대에 사람들이 떨쳐 내는 고통을 제 몸에 품고 진주를 키우는 정신의 천연기념물이다. 시인들이 있기에 권태와 허무와 절망마저 뜻과 생기를 얻고, 우연의 응축들로 이루어진 모든 삶들이 빛난다.

46.

눌리고 찢긴 가슴을 펴주고 시대를 초월해서 심금을 울린다. 그게 좋은 시다.

47.

시는 심미 본능에서 발현하는 언어 예술이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시의 목적은 아니다. 시는 일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뜻의 곡진함, 말법의 새로움, 생동하는 기운이 한데 어우러질 때 시는 제 빛을 낸다.

감히 시가 생계를 견인하는 일보다 갈급하며 숭고한 사업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심미적 감각을 세련되게 하며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다정한 인격을 키워주는데 제격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때때로 인간은 먹고 사는 것과 결부된 합목적성을 넘어서서 숭고함의 본질 속에서 우리 삶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

시는 그 숭고한 욕망의 구체적 현존이다. 그래서 시를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48.

한편에서는 빈곤이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과잉이라고도 한다. 유협의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지금 우리 시단에는 기화요초와 함께 매와 꿩과 봉황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형국이다. 매는 높이 날 수 있으나 볼품이 없다. 꿩은 화려하나 높이 날지 못한다. 옛것을 잇는 작품은 새로운 기풍이 부족해 어딘지 진부하고, 낡은 기풍을 혁신한다는 작품은 옛것의 심오함을 품지 못한 채 신기성만 쫓으니 어딘지 뿌리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오직 높이 날면서 아름다운 것은 봉황뿐이다. 유협은 동양 문예미학의 빼어난 고전인 『문심조룡』에서 풍(風), 골(骨), 채(采)가 두루 갖춘 작품만을 이상적인 경지에 오른 것으로 꼽았다. 봉황은 어느 시대에나 흔치 않다. 흔하면 그게 어디 봉황이냐 ! 허나 드문 것도 생산의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생산에 활기를 더하도록 북돋는 것은 봉황의 출현에 보탬이 되는 일이다.

생각은 그 사람을 만든다


제임스 앨런은 19세기에 태어난 영국의 문인이다.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진 게 없는 작가지만 우연히 얇은 책 한 권을 읽고 감동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본디 유복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아버지가 파산을 하고 살해당하는 바람에 불운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 부양을 하던 중 38세에 톨스토이의 저작들을 읽은 뒤 직장에서 은퇴하고 영국 남서부의 시골로 들어갔다. 거기서 검소한 삶을 살며 글쓰기와 명상을 통해 지혜를 키워갔다. 그의 책을 읽어나가다가 한 구절에서 얼어붙은 듯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행동은 생각이 꽃 피운 것이고, 기쁨과 고통은 생각의 열매이다.?

원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인과론적인 법칙은 마음과 행동에도 적용된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란 식물의 씨앗과 같다. 콩을 뿌린 밭에서 마늘의 싹이 올라오는 일이란 없다. 정금같이 바르고 순결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표변해서 악덕한 행동을 저지르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늘 비열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갑자기 고결한 행동을 하는 일도 없다. 우발적인 행동들도 우리의 어딘가에 숨어 있던 생각이 튕겨 나온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이란 마음의 텃밭에 뿌려진 씨앗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생각대로 자라나고 행동하게 된다. 물론 외부 환경이란 변수가 작용하기는 한다. 외부 환경이 씨앗들이 발아하는 것을 지체하거나 유보하게 할 수 있지만 씨앗들을 없앨 수는 없다. 외부 환경이란 수시로 바뀌는 것이고, 씨앗은 때를 만나 발아한다. 더 넓게 보자면 삶의 외부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환경이나 운명이란 것도 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지속하는 생각은 우리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영향 속에서 자신만의 성격과 환경이 탄생한다. 그러니 제 형편과 처지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제 삶의 주인은 바로 자기다. 지금 제 처지가 비참하고 황폐다면 제 삶을 돌아보며 짚어보아야 한다. 그 결과는 누구의 탓도 아니며 오직 제 생각과 판단의 결과인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제 능력과 가능성을 키우고, 생각을 바르고 보람 있는 목적으로 가꾼다.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진 존재다. 중요한 것은 품고 있는 뜻과 의지의 방향이다.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속의 욕구와 열망, 생각들을 바르게 가꾸고 그것에 온전히 따름으로써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생각을 살피는 걸 자기 성찰이라고 부른다. 정원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고 방치하면 정원은 잡초로 우거져 황폐해진다. 우리 마음도 정원과 같다. 마음속의 생각들은 수시로 건사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잡념들로 가득 차 자신의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마음의 텃밭에 어떤 씨를 뿌리는가는 오로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우리 생각은 어느 순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난다. 고결한 생각들을 품었다면 정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쁜 욕망들은 절제하고, 시련과 실패에 정정당당하게 맞서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마음속 생각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기적을 볼 수 있다. 불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제가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제대로 된 자기 성찰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나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맹목의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든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결과에만 신경을 쓰고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땀과 험난한 여정 따위는 무시해 버린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숭고한 과정이며 그 여정의 도덕적 정당성이다. 숭고한 과정과 여정의 도덕적 정당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속 생각에서 비롯된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우연한 행운이란 인생에서 결정적 변수가 되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 인생을 살게 될 뿐이며 인생이란 그 생각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제임스 앨런이 말하는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품어온 생각 그대로 자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에 관하여


사랑이란 대상에 대한 측은지심입니다.

사랑이란 자비입니다.

사랑이란 배려입니다.

사랑이란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이란 인생의 최고 기쁨이자 얼빠짐이며 때로는 광기입니다.

사랑이란 갈망입니다.

사랑이란 신기루입니다.

사랑이란 권력입니다.

사랑이란 중독입니다.

나는 그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불에 데인 것처럼 아프다. 모든 진짜 사랑은 불같은 사랑이다. 모든 진짜 사랑은 단 한 번의 사랑이다. 불의 고통을 품어 안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유사한 다른 그 무엇일 것이며, 단 한번이 아닌 것 역시 그러할 것이다. 기억과 망각의 저 뒤편에서 나는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잠은 잔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지나간 사랑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죽은 사랑이 아니라 늘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이다.
뜨거운 불은 모든 것을 녹인다. 불꽃의 혀가 춤추는 용광로의 고열 속에서 쇠가 녹아 붉은 물처럼 흐르는 광경은 경이롭고 장관을 이루는 구경거리이다. 그 무엇으로도 허물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쇠조차 불은 간단하게 녹여낸다. 불은 견고한 물질적 현존을 녹여내서 다른 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불의 힘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세고 무차별적이어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자, 저항하는 자를 간단하게 제압한다.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것에 저항하는 내부의 역동적 에너지조차 나중에는 불에 가세해서 본디의 생리와 한계를 간단히 하며 주체를 변화시킨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진짜 사랑은 여러 번일 수 없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사랑이 평생에 걸쳐 단 한번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여러 번 사랑을 겪는다 하더라도 사랑은 단 한 번의 유일무이성, 그 절대성 속에서 발견되고 겪어낸다는 뜻이다.
사랑은 늘 그것을 겪고 난 뒤 기억의 현재진행형 속에서 추체험하는 영혼의 율동, 기억의 몸짓이라는 것이다. 말하는 사랑은 늘 현재에 있지 않다. 현재에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느낌과 사유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오열과 같은 것.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몰입이자 초월이고, 있음과 없음이 태극의 문양처럼 하나로 얽혀 있는 상호적 교호로서의 죽음이다.
현재라는 중심 속에 있을 때 살아지기는 하되 기억의 작용으로서 사랑은 사유되지는 않는다.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게 될 때 보이는 것, “아하, 내게도 불같은 사랑이 지나갔구나 !”, 라고 알아차려지는 것이다.
우리 영혼엔 사랑이 지나간 수레바퀴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사랑의 시들은 그 수레바퀴 자국에 괴인 물의 표면에 낀 입동의 살얼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것들과 지금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대화, 심미적 회통(會通)의 겹을 보여준다.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지나간 사랑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랑은 서로를 은폐물로 삼는다. 과거는 현재 속에 숨고, 현재는 과거 속에 숨음으로써 그 생리와 한계, 그리고 실체는 가려지면서 진상은 파열하듯이 드러난다.
사랑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사랑이 궁극적으로 유예된 이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숨가쁜 사랑이라도 시간을 이기는 사랑은 없다. 모든 과실에는 까만 씨앗이 박혀있듯이 모든 사랑에는 이별이 숨어 있다. 그 씨앗이 있기에 또 다른 사랑이 싹트는 것이다.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나간 사랑은 현재의 사랑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랑은 이미 당신의 몸과 영혼, 삶의 중심을 관통하며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사랑에 관한 몇 편의 시들

수묵 정원 9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갈대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 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장석주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좌뇌 깨우기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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